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꿈들이 밤새 이도현을 괴롭혔다. 악몽의 잔향 속에서 깨어난 그의 이마엔 차가운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새벽 세 시. 정적 속에서도 그의 몸은 고통으로 떨고 있었다. 일주일째 제대로 넘기지 못한 음식 때문인지, 위장은 불길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젯밤보다 더욱 격렬해진 복통이 그의 내장을 할퀴는 거였다. 뒤틀린 위가 보내는 참혹한 고통에 그는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도현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통증에 시달렸다.
“아악... 안 돼... 이러면 안 돼...”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고, 손끝에서 저릿저릿한 신경망이 조여왔다. 위궤양이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는 증상이었다. H그룹에서 일할 때 의료진이 경고했던 위험 신호들이었다.
‘위 천공이 생기면... 복막염으로 죽을 수도 있어...’
이도현은 간호사인 아내 은주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스트레스성 위궤양이 만성적으로 악화하면 위벽에 구멍이 날 수 있고, 그럴, 경우에 응급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었다.
“여보, 정말 조심해야 된다구요. 스트레스 관리 잘하고, 규칙적으로 약 잘 먹고...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은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지난해 이도현이 인도네시아 출장에서 위궤양으로 현지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은주는 밤새 울었었다. 국제전화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애원했었다.
“여보, 제발 무사히 돌아 와...”
그때 무서워하는 은주의 목소리가 귀속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이도현은 어제 발견한 30년 전 무전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케이스는 녹슬었지만, 내부 회로는 생각보다 온전해 보였다. H그룹에서 해외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각종 통신 장비를 다뤄본 경험이 있었다. 몽골이나 베트남 같은 건설 현장에서는 위성 통신 장비나 무전기가 생명줄이었다.
“배터리가 문제였구나... 30년이나 됐으니 당연히 방전되었을 거고...”
하지만 이도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배운 응급 수리법을 떠올려보았다. 베트남에서 폭우로 통신 장비가 고장났을 때, 현지 기술자와 함께 임시 전원을 만들어 수리한 경험이 있었다.
‘과일 전지 같은 걸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해변으로 간 그는 구리선이나 금속 조각들을 찾기 시작했다. 쓰레기 더미에서 통 속에 담긴 낡은 건전지 몇 개와 구리선 조각을 발견했다. 비록 오래되었지만 무언가 시도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무전기 수리 작업을 하면서 이도현의 마음은 자꾸 가족에게로 향했다. 특히 은주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 그때 그랬지...”
15년 전, H그룹 의무실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였다. 그때 은주는 계약직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도현이 위궤양 진단을 받고 낙심하자, 은주가 다가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트레스성 위궤양은 충분히 관리할 수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따뜻한 미소에 첫눈에 반한 이도현은 일부러 위장병 상담을 핑계로 은주를 자주 만났다. 그리고 6개월 후 드디어 고백했다.
“사실 위장병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은주 씨를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우리 결혼해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위장병은 관리를 잘해야 나아요. 제가 평생 돌봐드릴게요.”
그 약속을 은주는 지금까지 지키고 있었다. 이도현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양배추즙을 끓여주고, 위에 좋은 음식만 해주고, 늦은 밤에도 마사지를 해주었다.
‘은주야... 미안해... 지금 나 때문에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딸 지민이의 기억도 선명했다. 3년 전 지민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도현이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지민이는 아빠를 위해 직접 만든 쿠키를 선물했다.
“아빠, 이거 제가 만든 거예요. 위에 좋은 재료로만 만들었어요.”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쿠키였다. 그런데 이도현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맛보지도 않았다.
“고마워, 나중에 먹을게...”
그때 지민이의 실망한 표정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어찌할 줄을 모르던 그 표정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그건 으레 과자류를 먹지 않았던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딸이 만든 건 방부제가 없는 순수한 과자인데...
‘그때 왜 그랬을까... 딸이 정성스럽게 만든 건데... 그래, 난 유머가 부족해. 너무 무뚝뚝한 게 탈이야...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도... 지민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다음날 오후 2시경, 이도현은 섬의 높은 곳에서 바다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젯밤 본 불빛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한 시간 정도 지켜보고 있는데, 정말로 멀리서 배 한 척이 보였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정확한 크기나 종류는 알 수 없었다.
‘저 배는 뭘까? 구조선일까? 아니면...’
이도현은 급히 구조 신호를 보내려고 나뭇가지를 모았다. 배를 향해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려 했지만, 바람 때문에 불이 제대로 붙지 않았다. 겨우 연기가 오르자 배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젠장... 놓쳤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이 해역에 배들이 지나다닌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정기적으로 지나다니는 항로라면,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것이었다. 도현은 더 효과적인 구조 신호를 생각했다. 반사판을 만들어 햇빛을 반사하거나, 더 큰 연기를 피우는 방법을 궁리했다. 먼바다를 응시한 그는 찬 바닷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 걸 느꼈다.
“보름 후면 12월이야... 눈이 오겠네...”
오후 4시, 이도현은 또다시 극심한 복통에 시달렸다. 이번에는 혈압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지럽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정말 위험해...’
은주가 경고했던 위 천공의 증상들이었다. 극심한 복통, 식은땀, 혈압 강하...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나카 이치로는 3개월을 버텼고, 김철수는 18일을 버텼지만, 그들은 위궤양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지병을 앓고 있는 상태에서 극한 스트레스를 덤으로 받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라도 남겨야 할까...?’
이도현은 벽면에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새기기 시작했다.
‘은주야, 지민아. 아빠가 이상한 섬에 갇혀있어. 아마 너희를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은주야, 15년 전 네가 해준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행복했어. 지민아, 아빠가 너를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실, 쿠키는 정말 맛있었어. 지금도 지민이를 생각하며 말한다. 사랑한다.’
글을 쓰면서 눈물이 났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도현은 곧 고개를 저으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은주라면 뭐라고 했을까.
“여보,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사람이잖아요...”
은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민이의 목소리도 귓가에 어른거렸다.
“아빠, 꼭 돌아와요. 제가 다시 쿠키 만들어드릴게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깨끗한 목소리. 딸은 공부도 잘했다. 커서 의사가 되겠다는 그 어린 마음에는 아빠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을 낫게 해준다는 착한 마음씨가 서린 것이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가 이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어...!’
이도현은 일어나 민들레 우린 물을 더 마셨다. 그리고 복식호흡을 하며 스트레스를 조절하려고 노력했다. 회사에서 배운 명상법도 시도해봤다. H그룹에서 직원들의 정신건강 관리를 위해 도입한 프로그램이었다. 당시에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명상 끝에 다가온 건 군대였다.
“이 일병! 완전 군장으로 다시 집합한다. 알았나?”
“넷! 알겠습니다...!!”
그때 그랬다. 사단 사령부 연병장을 완전군장 구보로 백 바퀴를 돌았다. 그 후부터는 위병이 사라진 거였다.
‘게 왜 지금 생각 났을까... 마음을 비우고... 호흡에 집중하고...’
30분 정도 명상을 하니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견딜 만한 수준이 되었다. 이도현은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무인도 해안을 뛰었다. 달리다가 지치면 걷고 쉬었다가 또 뛰기를 반복했다.
“헉...!! 괜찮아... 매일 규칙적으로 해야겠네...”
해 질 무렵, 서편 수평선에는 노을이 번졌다. 반짝이는 은빛 물결들이 눈길을 눈부시게 출렁이며 다가왔다. 이도현은 어젯밤처럼 바다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 불빛이 다시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
산 정상 근처에 관찰 지점을 만들었다. 반사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금속 조각들과 연기를 피울 수 있는 재료들을 비에 젖지 않도록 준비했다. 오후 8시가 됐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후 10시 30분, 드디어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젯밤과 비슷한 위치였다.
“저거다...!”
이도현은 즉시 준비해둔 연기 신호를 피웠다. 마른 나뭇가지와 젖은 풀을 섞어서 흰 연기가 많이 나도록 불을 피웠다. 그리고는 금속 조각으로 달빛을 반사해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불빛은 여전히 멀었고, 상대가 신호를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분 후 불빛은 다시 사라졌다.
‘적어도 시도는 했어... 내일도 다시 해보자...’
밤늦게 동굴로 돌아오면서, 이도현은 김철수가 남긴 다른 흔적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혹시 자신이 놓친 중요한 정보가 있을지 모르다는 생각에서였다.
구석진 곳에서 비닐봉지에 싸인 작은 노트를 발견했다. 30년이 지났지만, 비닐 덕분에 보존 상태가 좋았다. 노트를 펼쳐보니 김철수가 그린 섬의 지도와 함께 중요한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동쪽 해안에서 오후 3시경 배들이 지나감. 어선으로 보임.’
‘서쪽 절벽에 갈매기 알이 많음. 번식기는 3-5월.’
‘북쪽 만에 큰 물고기들이 가끔 들어옴. 그물이 있다면 잡을 수 있을 것.’
‘남쪽에 다른 동굴이 있을 것 같음. 확인하지 못함.’
더군다나 남쪽에 다른 동굴이 있다는 정보가 흥미로웠다. 김철수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은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내일 남쪽을 탐험해봐야겠어...’
밤이 깊어가면서 이도현은 하루를 돌아봤다. 위궤양이 악화하여 생명의 위험을 느꼈지만, 동시에 새로운 희망도 발견했다. 정기적으로 지나가는 배들이 있다는 것, 김철수의 상세한 기록들, 그리고 탐험하지 못한 남쪽 동굴은 모험이자 새로운 도전이었다.
‘아직 희망은 있어. 다나카와 김철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현대적 지식도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어...’
그렇게 생각한 그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궤양이 이런 속도로 악화하면 일주일을 버티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일주일 동안 뜀박질을 하고 일주일 안에 구조되거나, 아니면 탈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는 벽면에 오늘의 기록을 새겼다.
‘한 주가 지났다. 위궤양 급속 악화. 생명의 위험을 느낌. 하지만 정기 운항 배들 확인했다. 김철수의 상세 지도 발견. 남쪽에 미지의 동굴 존재 가능성. 무전기 수리 시도 중. 은주와 지민에게 보내는 편지도 남김. 시간이 많지 않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호롱불이 흔들리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130년 전 다나카, 30년 전 김철수, 그리고 지금의 자신, 무인도에 정착하는 세 사람의 절망과 희망이 같은 공간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도현은 달랐다. 그에게는 더 많이 쌓인 정보와 더 강한 동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은 남쪽 동굴을 찾아보자. 그리고 무전기 수리도 계속하고...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야.’
정어리 기름 냄새가 동굴을 채웠다. 하지만 이제 그 냄새는 절망이 아닌 희망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실패가 현재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무인도에서의 한 주가 끝나가고 있었다. 절망적인 순간들도 있었지만, 희망의 단서들도 하나씩 모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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