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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 생존 프로토콜

무인도 생존 프로토콜 9화 동굴 속의 비밀

by yyu009 2025. 6. 23.

<동굴 안에서 130년 전의 일본군을 발견하다>

 

새벽 5, 이도현은 차가운 이슬에 젖어 깨어났다. 꿈속에서 아내와 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는데, 깨어보니 갈매기들의 울음소리였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한 순간, 그는 자신이 여전히 이 낯선 섬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꿈이었구나... 집에 있는 게 아니라...’

몸을 일으키며 그는 어젯밤 마지막으로 본 별들을 떠올렸다. 그 별들도 집에서 볼 수 있는 같은 별들이었을 텐데, 이곳에서는 왜 그리 낯설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별이 낯선 것이 아니라, 별을 바라보는 자신의 처지가 낯설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샘물에서 얼굴을 씻으며 그는 생각했다. 여기서 하루 더 보낸다면, 사흘 더 보낸다면, 한 달 더 보낸다면... 과연 자신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잠시 현실을 망각한 그는 아내 은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침마다 커피를 끓이며 "오늘도 힘내"라고 말하던 따뜻한 목소리. 중학교 2학년인 딸 지민이 학교 가기 전에 "아빠, 다녀올게"라고 인사하던 까랑까랑한 음성. 그 평범했던 일상들이 지금은 보석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래, 내 가족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해. 포기할 수 없어. ’

이도현은 어제 대충 둘러본 섬을 좀 더 체계적으로 탐색하기로 마음먹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이 섬의 모든 자원과 위험요소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먼저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지형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동쪽은 갯바위가 많아 조개류를 구하기 좋았고, 서쪽은 절벽이라 갈매기 둥지가 많았다. 북쪽은 작은 만처럼 되어 있어 썰물 때 많은 생물이 웅덩이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남쪽은...

? 저기 뭐가 있네?’

남쪽 절벽 중간쯤에 검은 구멍이 보였다. 동굴인 것 같았다. 어제는 너무 서둘러 둘러봐서 놓쳤던 것 같다. 동굴이 있다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거처가 될 수 있었다. 이도현은 조심스럽게 절벽을 타고 올라가 동굴 입구로 향했다.

아니, 여긴...”

동굴 입구는 사람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다. 하지만 안쪽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불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겠네...’

먼저 불을 피우는 방법을 머리에 떠올렸다. 이도현은 해안가에서 마른 나뭇가지와 마른 지푸라기를 모았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깨진 유리병 조각을 가져왔다.

햇빛을 모아서 불을 피울 수 있을까?’

유리 조각을 렌즈처럼 사용해 햇빛을 한 점에 모으는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지만, 각도를 조절하며 계속 시도하니 마침내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됐다!”

작은 불꽃이 솔잎에 옮겨붙었다. 입으로 조심스럽게 바람을 불어넣으니 불이 점점 커졌다. 나뭇가지를 추가하며 제법 큰불을 만들 수 있었다. 불을 한 묶음의 나뭇가지에 옮겨 즉석 횃불을 만들었다. 이제 동굴을 탐험할 준비가 되었다.

안에 뭐가 있을까...?”

동굴 입구에서 잠시 망설였다. 안쪽에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뱀이나 박쥐, 혹은 다른 위험한 동물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바람을 피할 곳이 필요했다. 용기를 낸 이도현은 횃불을 들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

동굴은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횃불 빛이 닿는 범위에서만 봐도 높이가 3m는 되어 보였고, 안쪽으로 상당히 깊숙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바닥은 모래와 작은 돌들로 덮여 있었다. 다행히 뱀이나 위험한 동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저게 뭐지?’

바닥에 뭔가 금속성 물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총알 탄피였다. 녹이 슬어 있었지만, 분명히 탄피였다.

탄피? 왜 여기에...?”

이상했다. 무인도인 줄 알았는데 총알 탄피가 있다는 것은 과거에 누군가 이곳에서 총을 쏜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더 많은 잡동사니가 보였다. 녹슨 철제 수통, 부러진 총검 조각, 그리고...

이건... 군모?”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 들었다. 천이 대부분 썩어 있었지만, 형태로 보아 군용 모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모자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을 보니...

일본군...?”

더 깊숙이 들어가자 이도현의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뭔가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동굴 가장 안쪽에 다다랐을 때, 횃불 빛이 비춘 것은...

으악...!”

해골들이었다. 여러 구의 뼈들이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있거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것들은 아직 낡은 군복 조각들 속에 남아있었다. 이도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손이 떨려 횃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이게 뭐야... 왜 여기에 사람 해골이...’

공포가 온몸을 휩쌌다. 죽음의 흔적들이 그토록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의 뼈, 누군가의 두개골,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들... 그는 갑자기 이 섬이 저주받은 곳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결국 이들처럼 되는 건 아닐까. 이 동굴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결국 이도현은 동굴 입구로 뛰쳐나왔다. 횃불을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터질 듯 뛰고 있었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진정해... 진정하라고...’

하지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방금 본 그 해골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텅 빈 눈구멍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마치 "너도 곧 우리처럼 될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공포는 물결처럼 밀려왔다. 이 섬에서 혼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고립감...

하아... 하아...”

과호흡이 시작됐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때였다. 바람에 실려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야악... 끼야악...”

부드럽고도 애잔한 그 소리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이 섬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갈매기들도 있고, 다른 새들도 있고, 작은 게들과 물고기들도 있었다. 생명이 있는 곳이었다.

은주야...’

마음속으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결혼식 날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 딸을 낳고 처음 품에 안았을 때의 행복한 미소, 평범한 저녁 식탁에서 "오늘 회사는 어땠어?"라고 묻던 따뜻한 눈빛...

내 딸... 지민아...’

딸의 모습도 떠올렸다. 어렸을 때 자신의 무릎에 앉아 "아빠, 책 읽어줘"라고 조르던 모습, 초등학교 입학식 날 교복을 입고 수줍게 웃던 모습, 최근에는 사춘기라 투덜거리면서도 몰래 아빠를 걱정하던 모습...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자 공포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 나는 그 해골들과는 다르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가족에게 돌아갈 거야.’

이도현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말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바다를 바라보며 그는 다짐했다.

은주야, 지민아... 아빠가 꼭 돌아갈게.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게.”

그 말을 하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공포는 여전히 있었지만, 이제 그것에 압도당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이도현은 다시 동굴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공포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도대체 이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글세... 일본군이면 2차 세계대전...”

새로운 횃불을 만들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해골들을 보고도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히 관찰해보려고 다가섰다. 군복의 잔해들을 보니 확실히 일본군 복장이었다. 계급장 흔적도 보였고, 단추에 새겨진 문양도 일본 것이었다. 총기류의 파편들도 있었는데, 형태로 보아 옛날 구식 소총인 것 같았다.

언제 적의 일이지? 태평양전쟁 때? 아니면 그보다 더 옛날?’

탄피의 녹슨 정도와 뼈들의 상태를 보니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이전, 혹은 그 초기의 일인 것 같았다. 동굴 벽면을 살펴보니 일본어로 새겨진 글자들도 있었다. 대부분 희미해서 읽기 어려웠지만, 날짜로 보이는 숫자들이 몇 개 보였다.

“1894... 1895...?”

그 숫자들을 보고 이도현은 깨달았다.

청일전쟁 시기구나!”

청일전쟁(1894-1895)은 중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이 중국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이런 섬들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점들이 보였다. 군사 장비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또한, 벽면에 새겨진 글자 중에는 '(아라시 - 폭풍)'이라는 단어도 보였다.

잠깐... 혹시 이들도...?’

이도현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이들이 원래 이 섬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폭풍에 휘말려 이곳에 표류해온 것은 아닐까. 흩어진 장비들, 부족한 보급품, 그리고 벽면의 '폭풍'이라는 글자... 모든 것이 그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배도 태풍에 침몰했을 거야. 그래서 이 무인도에 표류해온 거고...’

130년 전, 청일전쟁 당시에도 이 바다에는 무서운 태풍들이 몰아쳤을 것이다. 일본군 수송선이나 전함이 그런 태풍에 휘말려 침몰하고, 생존자들이 이 섬에 표류해온 것일 수도 있었다.

나와 똑같은 상황이었구나...”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130년 전 이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섬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걱정하면서... 하지만 결국 그들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구조되지 못했고, 섬을 벗어나지 못했고,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질병? 아니면 식료품 부족? 아니면 추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3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우연히 이곳에 표류해온 것이었다. 동굴 밖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며 이도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1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같은 바다에서 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이 바다가 가진 어떤 숙명 같은 것일까.

그들도 처음에는 희망을 가졌을 거야. 구조될 거라고 믿었을 거고...’

벽면에 새겨진 날짜들을 보니 그들이 몇 달간은 버텼던 것 같았다. 처음 며칠, 몇 주는 구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절망에 빠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이 자라났다. 130년 전 그 일본군들도 분명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은 다르다고,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들은 모두 이 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들과 나의 차이점은 뭘까...?’

이도현은 생각해봤다. 시대적 차이, 130년 전에는 수색 기술이나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GPS도 있고, 위성 통신도 있고, 해상 구조 시스템도 훨씬 발달했다.

그래, 분명히 누군가 나를 찾고 있을 거야. 백두호 침몰 소식도 알려졌을 테고...’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 섬의 위치가 너무 외딴곳이라는 것, 폭풍으로 인해 정확한 위치 파악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

아니야,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그들과 나는 다르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공포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해골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꺼림칙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니 이 동굴만큼 좋은 거처는 없었다.

해골들을 밖으로 옮기자. 그러면 이 동굴을 거처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이도현은 결정을 내렸다. 죽은 자들에 대한 예의도 차려야 했고, 동시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이 공간이 필요했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해골들을 밖으로 옮겼다. 7구의 해골이 있었다. 아마도 7명의 일본군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 같았다. 동굴 입구 근처에 작은 무덤을 만들어 해골들을 안치했다. 돌을 쌓아 간단한 묘표도 만들었다. 종교가 다르고 적국의 군인이었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편히 쉬세요...”

작은 기도를 올린 후, 동굴로 돌아갔다. 이제 이곳이 자신의 거처가 될 것이었다. 해골들을 치운 동굴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바람과 비를 막을 수 있고, 온도도 일정하게 유지될 것 같았다. 바닥을 깨끗이 정리하고, 마른 풀과 나뭇잎을 깔아 침대를 만들었다. 동굴 입구 근처에는 화덕을 만들었다. 돌을 쌓아 둘러싸고, 그 안에 불을 피울 수 있도록 했다.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입구 쪽에서 피우는 것이 중요했다.

, 이건 쓸만하네...”

일본군들이 남긴 물건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녹슨 철제 수통은 깨끗이 씻으면 물을 보관하는 데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부러진 총검 조각은 칼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골들 주변을 더 자세히 살펴보니 흥미로운 물건들이 더 있었다. 한 해골 옆에는 녹이 슬었지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검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장교용 군도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작은 밀폐된 통이 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독특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뭐지? 정어리 냄새?”

비린내가 강하게 났지만, 동시에 기름 냄새도 섞여 있었다. 아마도 등유나 어유 같은 연료용 기름인 것 같았다. 당시 일본군들이 조명용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또 다른 해골 근처에서는 부싯돌과 쇳조각을 발견했다. 1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발견은 작은 호롱이었다. 놋쇠로 만든 것 같았는데, 녹이 슬긴 했지만 구조는 온전했다.

이것들로 불을 켤 수 있겠네!’

이도현은 호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밑부분에는 기름을 넣는 곳이 있고, 위쪽에는 심지를 꽂는 부분이 있었다. 전형적인 옛날 등잔의 형태였다. 먼저 호롱을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발견한 기름통에서 조금씩 기름을 따라 넣었다. 130년 된 기름이었지만 밀폐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직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는 해골들의 군복 천 조각을 이용해 만들었다. 가느다란 천 조각을 꼬아서 심지로 만든 다음, 호롱에 꽂았다.

불이 붙을까...?”

이제 불을 붙일 차례였다. 부싯돌과 쇳조각을 부딪쳐 불꽃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지만, 몇 번 시도하니 작은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을 조심스럽게 심지에 옮겼다.

치이익...”

심지에 불이 붙으면서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곧 안정된 노란 불빛이 호롱 전체를 밝혔다. 정어리 기름 특유의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밝은 불빛이 동굴을 환하게 비췄다.

...! 됐다!”

130년 전 일본군들이 사용했던 호롱이 다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호롱불을 들고 동굴 안을 다시 살펴보니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더 보였다. 벽면의 글자들도 더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고, 구석구석에 숨겨진 물건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남긴 것들이 이제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구나...’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130년 전에 죽은 일본군들의 유품이 지금 자신의 생존 도구가 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이도현은 동굴에서 첫 번째 밤을 보낼 준비를 갖췄다. 화덕에 불을 피우고, 130년 전 일본군의 호롱에도 불을 켰다. 두 개의 불빛이 동굴 안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호롱불의 노란 불빛이 동굴 벽을 부드럽게 비추자, 벽면에 새겨진 글자들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일본어로 된 이름들과 날짜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새겨진 '고향', '가족', '어머니' 같은 단어들...

그들도 이런 호롱불을 켜고 밤을 보냈겠구나...’

13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같은 불빛, 같은 동굴, 같은 외로움... 이도현은 마치 그 일본군들과 시공을 초월해 연결된 기분이었다. 정어리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처음에는 비린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왠지, 위로되는 냄새로 느껴졌다. 이 냄새도 130년 전 그들이 맡았던 것과 같은 냄새일 것이다.

그들도 가족이 있었을 텐데... 고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호롱불이 만드는 그림자들이 벽면에서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보니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130년 전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벽면의 한 구석에서 특별한 글귀를 발견했다:

妻子를 위해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50일이 지났다...’

호롱불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읽어보니 그 아래에 더 작은 글자로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호롱불을 보면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내와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새긴 글이었다. 그리고 호롱불을 보며 아내를 그리워했다는 내용까지... 이도현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구나...’

이도현도 호롱불을 바라보며 아내 은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녁 시간에 따뜻한 등불 아래서 뜨개질을 하던 모습, 딸과 함께 책을 읽어주던 모습...

‘50... 나는 이제 겨우 둘째 날인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50일을 버텼는데도 결국 죽었다는 것은, 구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시대가 다르다. 130년 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고.’

그때는 무선통신도 없었고, 현대적인 수색 장비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분명히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호롱불을 바라보며 그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거야. 반드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불안이 꿈틀거렸다. 130년 전 이곳에서 죽어간 일본군들도 분명 같은 생각을 했을 텐데... 호롱불이 흔들리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들의 절망과 자신의 희망이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있었다.

아니야,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살아남을 거야. 반드시...’

정어리 기름의 냄새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이제는 위로가 되었다. 130년을 뛰어넘어 전해지는 인간의 온기 같았다.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동굴까지 들려왔다. 바람 소리도 들렸고, 멀리서 파도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 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외로움을 달래주는 자장가 같았다. 무인도에서의 둘째 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공포와 절망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냈다. 내일은 더 체계적으로 생존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불꽃을 바라보며 이도현은 가족들을 떠올렸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경험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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