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마지막 햇살마저 검은 구름 뒤로 사라지자 서해는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폭풍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 별빛도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백두호의 비상등만이 거친 파도 속에서 외로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이도현은 선실 창가에서 밖을 내다봤지만, 손바닥만큼 가까운 거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지웠고, 백두호는 마치 우주 공간에 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아... 무서워...”
인터넷 방송팀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낮에는 그나마 주변을 볼 수 있어서 이곳저곳을 촬영하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거대한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
“쾅...! 쾅...!”
보이지 않는 파도가 백두호를 때릴 때마다 배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예상할 수 없는 충격 때문에 승객들은 더욱 불안해했다. 언제 어떤 방향에서 큰 파도가 올지 알 수 없었다. 강도식 선장은 조타실에서 비상등의 희미한 불빛에 의존해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레이더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나침반도 계속 흔들려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박 기관장, 엔진 상태는 어때?”
“아직도 여전히 안 됩니다. 기관실에 물이 더 차올랐어요. 이대로 가면...”
박만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오후 8시, 백두호에 심각한 변화가 나타났다. 배가 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바닥이 기울어진 것 같은데?”
70대 노인이 먼저 눈치챘다. 40년 바다 경험으로 쌓인 감각이었다.
“정말이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
이도현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미세한 기울어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선장님! 배가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대기업 사원이 조타실로 소리쳤다. 강도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기관실에 물이 차면서 배의 무게중심이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엔진이 멈춘 상태에서 배수펌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박 기관장! 수동으로라도 물을 퍼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데, 따라가질 못해요! 어디선가 계속 물이 들어오고 있어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엔진실에 구멍이 뚫렸거나 이음새가 벌어진 것 같았다. 거센 파도의 압력을 20년 넘은 낡은 배가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배가 점점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안 승객들 사이에서 패닉이 시작되었다.
“우리 죽는 거야? 정말 죽는 거야?”
스무 살 청년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소리쳤다.
“진정해!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
중년 여성이 아들을 달랬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X발... 왜 하필 배가 고장이야...”
대기업 사원 중 한 명이 욕을 내뱉었다. 평소의 점잖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극한 상황에서 본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인터넷 방송팀은 카메라를 꺼내 선장을 촬영하려고 초점을 들이댔다.
“지금 뭐하는 거요?”
“이것도 콘텐츠가 될 수 있어서...”
“미쳤어요? 이 상황에?”
다른 승객들이 분노했다. 생사가 걸린 현실에서 촬영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이도현은 이런 혼란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패닉에 빠지면 살 가능성이 더욱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면 안 돼...’
조타실에서 강도식과 박만수는 마지막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거운 표정은 심각했다.
“이대로 가면 몇 시간 못 버틸 것 같은데요.”
“구조 요청은 안 돼나?”
“전파가 완전히 막혔어요. 이런 폭풍에서는...”
강도식은 30년 바다 경험으로도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엔진도 멈추고, 통신도 두절되고, 배는 침수되고 있었다.
“조명탄은 있나?”
“몇 개 있긴 한데... 이런 날씨에 누가 볼까요?”
하지만 시도라도 해봐야 하는 거였다. 강도식은 비상용 조명탄을 가져왔다.
“하나씩 쏴보자. 혹시라도 다른 배가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붉은 조명탄이 어둠 속으로 솟아올랐다. 잠시 하늘을 밝혔지만, 곧 사라져버렸다. 폭풍 속에서는 멀리까지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오후 9시, 상황이 더욱 악화했다. 배 기울어짐이 2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모든 승객은 구명조끼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가능한 한 높은 곳으로 이동해주세요.”
강도식 선장의 안내가 나왔다. 이제 정말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선장님, 정말로 배가 가라앉는 건가요?”
70대 노인이 조용히 물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강도식은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이도현은 허리춤의 빈 수통 2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 바다에 빠지게 되면 이것들이 부력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다시 되새김한 아내의 마지막 말...
“조심해서 다녀와. 사랑해.”
딸과 제대로 대화한 것도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사춘기라 아빠를 멀리했지만, 지금은 그 무뚝뚝한 얼굴이 정말 그리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
심호흡을 몇 번 거듭한 이도현은 선장과 기관장을 주시했다. 그들은 이미 결심한 듯 선장이 먼저 말했다.
“구명정을 준비합시다.”
강도식이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백두호에는 30명용 구명정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박 기관장, 구명정을 내려!”
“알겠습니다!”
박만수가 갑판으로 나가 구명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거친 바다에서 구명정을 띄우는 건 쉽지 않았다.
“모든 승객은 갑판으로 나와주세요! 안전줄을 꼭 잡고 이동하세요!”
승객들이 하나둘 갑판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거센 바람과 비가 그들을 맞았다. 파도가 갑판을 덮칠 때마다 모든 사람이 물에 젖었다.
“구명정이 너무 작아!”
인터넷 방송팀이 소리쳤다. 정말로 30명용 구명정은 승객과 2명의 선원 모두를 태우기에는 부족했다.
“일단 여성과 노인분부터...”
강도식이 말을 시작했지만, 이때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오후 10시, 백두호가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30도, 40도... 기울어짐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모두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하세요!”
강도식의 절규가 폭풍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구명정은?”
“물에 뜨지 못해요! 파도가 너무 세요!”
정말로 구명정도 거센 파도에 휩쓸려 뒤집혀버렸다. 이제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두 흩어져서 뛰어들어! 한곳에 몰리면 위험해!”
이도현은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떠올렸다.
‘여보, 딸... 미안해. 아빠가 꼭 살아서 돌아갈게...!’
그리고 그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쌌다. 11월, 서해바다의 차가움이 뼈를 에는 듯했다. 구명조끼 덕분에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거센 파도가 그를 이리저리 사정없이 밀어냈다.
“살려줘...!”
“도와줘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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