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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 생존 프로토콜

무인도 생존 프로토콜 11화 동굴의 비밀

by yyu009 2025. 6. 25.

<민들레 약초를 캐는 표류자>

 

새벽 네 시, 어둠이 짙은 시간. 이도현은 깊은 뱃속에서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에 의해 잠의 세계에서 무자비하게 끌려 나왔다. 배꼽 아래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칼날이 살을 비집고 들어와 내장을 휘젓고 있었다. 고통은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의식을 흔들었고, 차가운 땀방울들이 이마에서 영롱한 구슬처럼 맺혔다가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온몸이 잎사귀처럼 부들부들 떨렸고, 어둠 속에서 홀로 고통과 마주했다.

으으... ...!”

한참이 지나 고통의 칼날이 서서히 무뎌지자, 이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호롱불을 집어 들었다. 황금빛 불꽃이 침묵을 깨우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촛불을 든 순례자처럼 조심스럽게 바위벽을 어루만졌다.

으음...!”

어스름한 불빛 아래, 바위에 새겨진 일본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혼이 깃든 듯 정성스럽게 조각된 그 글자들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영혼의 울림이었다.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예술품처럼, 글자 하나하나에는 절절한 마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건... 살아있는 글씨야...”

이도현은 다나카의 기록 앞에 앉았다. 고국에 남겨둔 가족의 그리움이 바위에 스며들도록 글귀들이 패여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자신이 130년 전, 그때로 돌아가 그 일본군의 생각 정수리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건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는 순간이었다.

은주는 지금 무엇을 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을까... 지민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의 속삭임이 동굴 벽에 부딪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아내 은주는 간호사였다. 밤 근무도 많고 힘든 일이었지만, 항상 밝게 웃으며 가정을 돌봤다. 자신이 위궤양으로 고생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죽을 끓여주는 모습이 떠오른 도현은 어느새 눈물이 핑 돌았다.

여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천천히 먹어요. 위에 좋은 음식만 해줄게.”

은주의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편의 실종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간호사라서 각종 응급상황을 많이 봤을 텐데, 바다 조난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었다. 딸 지민이는 어떨까. 중학교 2학년이라 사춘기 한복판이었다. 평소에는 아빠를 귀찮아했지만, 정말 아빠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상황에서는 어떤 마음일까. 작년 지민이 생일 때 베트남 출장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또다시 후회되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영영 못 만날 수도 있구나...’

이도현은 동굴 벽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은주야, 미안해.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너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어. 지민아, 아빠가 너의 생일도 놓쳤지? 만약 아빠가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될게...’

복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도현은 동굴을 더 탐험하기로 생각했다. 어제는 다나카의 기록에 집중했지만, 혹시 더 안쪽에 다른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호롱불을 든 그는 동굴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점점 좁아지더니 마침내 막다른 곳에 도달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저건 뭐지...?”

벽면 한쪽에 인위적으로 돌들을 쌓아놓은 흔적이 있었다. 130년 전 일본군들의 작업치고는 너무 정교했다. 그리고 돌들 사이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 뒤에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이도현은 일본군이 남긴 도검으로 조심스럽게 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복통 때문에 힘이 없었지만, 호기심이 고통을 이겨냈다. 30분 정도 작업하자 작은 구멍이 뚫렸다. 호롱불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보니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뭘까...?”

더 큰 구멍을 만들어 몸을 밀어 넣었다. 그곳은 첫 번째 동굴보다 작지만,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자 이도현은 깜짝 놀랐다. 130년 전 일본군의 유물들과는 전혀 다른 물건들이 있었다. 모서리에는 녹슬었지만 현대적인 디자인의 금속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한글로 쓰인 글씨들이 보였다.

? 이건, 우리 말이잖아?”

호롱불을 가까이 댄 도현은 빛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글씨들을 소리를 내어 읽었다.

김철수, 1993815. 태풍으로 어선 침몰. 이곳에서 대피...”

1993... 30년 전의 기록이었다. 그 아래에는 더 많은 기록이 쓰여 있었다.

“818, 사흘째. 구조신호를 보내려 하지만 통신 장비가 고장 났다. 일본군 유물들 발견. 이상한 우연이다. 825, 10일째. 식수가 부족하다. 빗물을 받아 마시고 있다. 조개와 해초로 연명했다.”

그의 글씨는 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으로 쓴 구절이었다. 몇 자는 지워진 흔적이 있었지만 전후 맥락으로 그 단어를 유추할 수 있었다. 김철수. 그 남자의 나이는 몇인지, 고향이 어딘지, 궁금했던 도현은 글씨를 따라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91, 18일째. 구조선을 봤지만, 너무 멀어서 신호를 보낼 수 없었다. 너무 아쉽다.”

김철수라는 사람도 자신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록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마지막 날짜 이후로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도현은 금속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30년 전의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낡은 라이터, 비닐봉지에 든 성냥, 그리고 놀랍게도 워키토키 모양의 작은 무전기가 있었다.

무전기? 혹시 작동할까...?”

하지만 30년이나 된 기계였고, 배터리도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챙겨두기로 작정했다. 그 부근을 자세히 살펴보니 더 충격적인 발견이 있었다. 구석에 사람의 뼈가 몇 개 있었다. 김철수의 것으로 보였다. 결국, 그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 같았다. 도현은 소름이 돋았다. 이 섬은 단순한 무인도가 아니었다. 130년 전 일본군들, 30년 전 한국인 어부, 그리고 지금 자신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조난자들이 연쇄적으로 이곳에 표류해온 것이었다.

이 섬이... 조난자들의 무덤인 건가...?’

서해의 해류나 지형적 특성 때문에 태풍이나 폭풍을 만난 배들이 이곳으로 떠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구조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나카 이치로도, 김철수도 모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죽어갔다. 그들의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외딴 섬에서 외롭게 죽어갔다는 것을...

나도 그들과 같은 운명인 건가...?’

도현은 절망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분노도 치솟았다.

아니야!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하지만 극도의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위궤양이 다시 악화하기 시작했다. 복통이 더욱 심해졌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심해져...으음...!!”

이도현은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쳤다. 위산이 역류하면서 목까지 타는 듯한 화끈거림이 치솟았다. 평소에 먹던 제산제나 위장약이 절실했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끄윽...!! 이러다가 위에 구멍이 나면... 죽을 수도 있어...”

신경성 위궤양은 스트레스와 직결되는 질병이었다. 지금처럼 극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H그룹에서 일하면서 이 병이 생긴 것도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해외 프로젝트 마감에 쫓기거나,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상대할 때마다 위가 쓰리고 아팠다. 3년 전 인도네시아 프로젝트에서 현지 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될 뻔했을 때, 일주일 동안 거의 먹지도 못하고 회의만 반복했었다. 그때 위궤양이 심해져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아팠는데... 지금은 병원도 없어...’

이도현은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통증을 견뎌내려 안간힘을 썼다. 혼미해진 머리에서 떠오른 건 회사에서 배운 스트레스 관리법이었다.

심호흡... 천천히 심호흡...”

복식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진정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나에게는 현대적 지식이 있고, 다나카와 김철수의 경험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은주와 지민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통증을 참았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고통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견딜 만한 수준이 되었다.

...! 이겨냈어... 일단은...”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스트레스가 계속되는 한 위궤양은 반복될 것이었다. 약물치료 없이는 점점 악화할 가능성이 컸다.

약초라도 있으면... 뭔가 위에 좋은 것이...’

이도현은 동굴에서 나와 섬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혹시 위에 좋은 약초나 식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H그룹에서 베트남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현지 직원들이 배탈이 났을 때 어떤 나뭇잎을 우려서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자연에는 분명 치료 효과가 있는 식물들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잘못된 식물을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다.

너무 튀는 식물은 독이 있다던데...”

섬을 돌아다니며 여러 식물을 관찰했다. 그중에서 민들레와 비슷한 식물을 발견했다. 항염 치료와 소화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잎을 따서 씹어보았다. 쓴맛이 났지만, 독성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속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것도 하나의 희망이네...’

해가 질 무렵, 도현은 동굴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했다. 김철수의 기록을 발견한 것은 충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30년 전의 경험담도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전기는 비록 고장이 났으나 수리할 수 있다면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밤이 깊어갈 무렵,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다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별빛이 물에 반사되는 것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움직이고 있었다. 배의 불빛 같았다.

구조선인가? 아니면...”

이도현은 즉시 동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불빛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정말 배였는지, 아니면 환상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 배였다면, 이 섬 근처에 사람들이 오간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구조선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의 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일은 주의 깊게 바다 근처를 관찰하자...’

무인도에서의 넷째 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비밀들을 발견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들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몸과 정신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이 섬에서 죽어간 모든 사람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현은 호롱불을 바라보며 오늘의 기록을 벽면에 새겼다.

넷째 날. 김철수의 기록 발견. 이 섬은 조난자들의 무덤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위궤양이 악화하고 있다.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있다. 바다에서 이상한 불빛을 봤다. 내일 더 자세히 관찰할 예정이다. 은주와 지민을 위해 반드시 살아남겠다.’

정어리 기름 냄새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130년 전 일본군, 30년 전 한국인 어부, 그리고 지금의 자신, 시간을 뛰어넘은 생존 의지가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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