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째 무인도에서 표류하던 도현은 기상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새벽 5시, 이도현은 이상한 기운에 잠에서 깨어났다.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호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가보니 하늘이 바다로 내려앉을 듯이 어둡게 변해 있었다. 문득 보니 서쪽 수평선에서는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상하다... 기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
H그룹에서 해외 건설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각종 기상 상황을 겪어본 이도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일상적인 기상변화가 아니었다. 겨울철 문턱이지만 동중국해의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갈매기들의 행동도 평소와 달랐다.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불안하게 울어대며 서쪽 절벽에서 내륙 쪽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자연의 변화에서 동물들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한 것이었다.
“이건... 뭔가 조짐이 위험할 것 같은데...”
오후부터 내린 겨울비는 강한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파도 위로 떨어졌다. 잠시나마 지나가는 비가 아니었다. 이도현은 급히 동굴로 들어가 생존 물품들을 점검했다. 다나카의 기록에도 폭풍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지금 몰려오는 폭풍우는 그보다 더 강력해 보였다. 자정 무렵에는 천둥과 번개가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서도 바람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몰아쳤다. 호롱불이 바람에 꺼질까 봐 촛불 심지 주변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다나카와 그의 동료들도 이런 폭풍을 겪었을까...”
다음 날 아침에는 나무들이 쓰러질 듯한 강한 바람이 섬을 휩쓸었다. 무시무시한 돌풍이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했다. 바람에 휩쓸린 나뭇가지들과 흙먼지가 나선형으로 회오리를 돌면서 날아다녔다.
“이런 날씨는 처음 보네...”
온종일, 아니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돌풍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도현은 조심스럽게 동굴 밖으로 나왔다. 폭풍이 지나간 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갯바위로 나가 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에 없었던 하얀 선체가 파도에 삐걱거리며 기울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난파선이었다. 5톤급 배였는데, 말로만 들었던 해양 레저용 선박인 것 같았다.
“저게... 정말 요트...?”
가슴이 설렌 도현은 구명조끼를 착용한 후에 30여 미터를 수영해서 배에 도착했다. 30도 정도 기울었지만 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선실을 살펴보니 이것은 단순한 레저 보트가 아니었다.
“와...! 이런 시설이...”
조타석에는 최신형 GPS와 어군탐지기, 레이더가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놀랍도록 넓은 캐빈이 펼쳐졌다. 좌현 쪽에는 5인용 침실과 소형 화장실이, 우현에는 싱크대와 냉장고, 전자레인지까지 갖춘 갤리가 자리했다. 중앙의 살롱에는 가죽 소파와 접이식 테이블이 있어 마치 작은 아파트 같았다. 마호가니 원목으로 마감된 내부와 은은한 LED 조명, 그리고 각종 안전장비가 완벽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아하니, 이 요트의 주인이 상당한 부를 가진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적혀 있네...”
벽면에는 네덜란드어로 쓰인 해도와 항해 일지들이 붙어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사진을 보니 3명의 네덜란드인이었다. Jan, Pieter, Emma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젊은 남성 둘과 한 여성. 모두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들이 항해자들이야...”
하지만 그들은 어디로 간 건가. 배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사람은 없었다. 구명보트도 없어진 것으로 보아 폭풍 전에 미리 대피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배 안의 내용물들이었다. 5톤급 레저 보트는 60마력의 엔진도 튼튼했고 각종 낚시도구와 의류, 심지어 간이 발전기까지 고루 갖춘 최신 요트였다. 더구나 의약품도 가득했다.
“이건...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거야...”
아마도 3인의 항해자가 1년 치를 견딜 만한 모든 것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레저용 선박이었다. 냉장고를 열자 전원이 나가 있어 음식들은 상했지만, 건조식품과 소시지는 여전히 멀쩡했다. 선반에 있는 캔 통조림만 해도 100여 개, 말린 과일과 견과류, 파스타면, 쌀, 밀가루까지. 1년은 넉넉히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의료함도 놀라웠다. 소독약, 붕대, 진통제, 항생제까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산제와 위궤양 치료제였다.
“이건... 정말 기적이야...”
이도현은 즉시 위약을 복용했다. 며칠 동안 고생했던 위궤양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엔진실을 확인해보니 디젤 엔진이 한 대, 예비용 소형 엔진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바닥의 기관실에는 200ℓ들이 드럼통이 열 개나 있었다. 빈 드럼을 제외하면 5드럼이 새것이었다. 1,000ℓ의 디젤 연료. 이 정도면 육지까지 충분히 갈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발견은 브리지에 있는 최신형 테트라 무전기였다.
“우와...!! 이건...”
도현은 무전기 앞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검은색 금속 케이스에 선명한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빛나고 있는 이 장비는 일반적인 VHF 해상무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MOTOROLA TETRA MTM5500’이라는 모델명이 새겨진 이 무전기는 해안경비대나 수상경찰에서나 볼 수 있는 전문 장비였다. 암호화 통신이 가능하고, 그룹 통화와 데이터 전송까지 지원하는 이런 고급 무전기가 개인 요트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이 배 주인이 대체 누구지?”
화면에는 여러 개의 채널이 등록되어 있었다. Coast Guard-1, Harbor Control, Operation Base... 도현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것은 단순한 부유층의 레저용 요트가 아니었다. 뭔가 훨씬 복잡하고 위험한 일에 연루된 배일 가능성이 높았다.
“비상용 전기는 살아 있네...”
신형 테트라 무전기는 수신은 됐으나 송신이 불가했다. 물에 젖어서 송신 부분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도현은 온종일 무전기 수리에 매달렸다. 김철수가 남긴 30년 전 무전기와 이 최신 무전기를 비교하며 수리를 시도했다. H그룹에서 배운 전자공학 지식이 도움이 되었다. 여러 시도 끝에 드디어 무전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수신뿐만 아니라 송신도 가능해진 것이었다.
“CQ, CQ, 이쪽은 무인도에서 조난한 생존자입니다. 누구든지 들리시면 응답해주세요.”
하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여러 주파수를 시도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후 늦게, 우연히 특정 주파수에서 이상한 신호를 포착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규칙적인 신호음이었다. 모르스 부호 같기도 하고, 규칙적인 암호 같은 신호였다.
“뭐지... 이게...”
신호는 매시 정각에 5분간 반복되었다. 누군가 정기적으로 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신호의 방향이 남쪽에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철수가 언급했던 남쪽 동굴과 관련이 있을까. 이도현은 베이스캠프를 네덜란드 선박으로 옮기기로 선 듯 결정했다. 동굴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전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주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배를 갯바위 안쪽으로 숨겨야 될 텐데...”
다음날, 이도현은 김철수의 지도를 참고해 남쪽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남쪽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고, 곳곳에 기이한 바위들이 솟아 있었다. 한 시간 정도 걸은 후, 정말로 또 다른 동굴을 발견했다. 입구가 작아서 찾기 어려웠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상당히 큰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동굴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벽면에는 인공적으로 파낸 흔적들이 있었다. 특이한 건 바닥에 녹슨 철제 도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곡괭이, 삽, 그리고 이상한 금속 탐지기 같은 장비들이었다.
“누군가 여기서 뭔가를 캐고 있었구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충격적인 것을 발견했다. 벽면에 뚫린 구멍들과 그 안에서 끄집어낸 것으로 보이는 금속 덩어리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현대적인 통신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로 그 통신 장비에서 아까 들었던 규칙적인 신호가 송신되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장비가 완전 자동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정기적으로 신호를 보내도록 미리 설정해둔 것 같았다.
“하...! 갈수록 아리송해...”
통신 장비 옆에는 각종 문서가 있었다. 대부분이 영어로 쓰여 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Rare Earth Mining Operation”- 희토류 채굴 사업
“Unauthorized extraction” - 비승인 채취
“Signal transmission schedule”- 신호 송신 일정표
이 섬에서 누군가 불법적으로 희토류를 채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모선에 신호를 보내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문서들을 더 살펴보니 더욱 기이한 사실을 알았다. 이 작업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마지막 기록이 일주일 전이었다. 즉, 채굴팀이 일시적으로 섬을 떠났지만, 곧 돌아올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이상해... 젠장... 이거 완전 불법이잖아...”
이도현은 당황했다. 불법 채굴업자들이 돌아온다면 자신의 존재가 발각될 것이었다. 그들이 증거인멸을 위해 자신을 해칠 수도 있었다. 네덜란드 선박으로 돌아온 이도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첫 번째 선택은 불법 채굴업자들이 돌아오기 전에 이 배로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엔진 상태가 불확실하고, 혼자 항해하기에는 위험하잖아….’
배가 온전한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리 기간도 한정할 수가 없었다. 배로 탈출을 시도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럼, 두 번째 선택은 숨어서 기다리다가 그들의 배를 이용해 탈출한다. 하지만 발각될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 있잖아….’
두 번째 선택도 문제가 있었다. 상대가 몇 명인지 도무지 정체가 무엇인지 섣불리 결정할 단계가 아니었다.
‘세 번째 선택은... 무전기로 해경에 신고해서 불법 채굴업자들을 체포하도록 할까... 하지만 그들이 먼저 도착할 가능성도 있잖아...’
세 번째 선택도 변수가 많았다. 최종적으로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할 단계가 아님을 판단한 도현은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무전기에서 새로운 신호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한국어가 아닌 모르는 외국어였다. 러시아 다국적 언어 같기도 하고, 중국어 같은 발음도 섞여 있었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뭐야...”
며칠 후면 그들이 돌아올 것 같았다. 이도현은 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아는 정보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덜란드인 3명의 행방이 걱정되었다. 혹시 그들이 불법 채굴업자들과 마주쳤을까. 그렇다면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을까. 밤이 되자 이도현은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다. 우선 불법 채굴업자들의 정확한 일정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남쪽 동굴의 통신 장비를 계속 주시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추적하기로 일정을 다변화시켰다. 그리고 만약의 때를 대비해 탈출 루트도 여러 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의 엔진을 수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도현은 브리지 선반에서 가져온 요트의 매뉴얼에 눈길이 멈췄다.
“일단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자...”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해경에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섬의 위치, 불법 채굴 현황, 그리고 실종된 네덜란드인들의 상황까지. 이도현은 무전기 앞에 앉아 신중하게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구조 요청이 아닌, 복합적인 상황 보고서였다. 무인도에서의 10일째 밤이 깊어갔다. 단순한 생존 투쟁에서 국제적 범죄와 연루된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도현은 이제 생존자가 아닌 증인이 되어야 할지도 몰랐다. 폭풍이 가져다준 것은 단순한 구원의 배가 아니라, 더 큰 위험과 더 복잡한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진짜 구조받을 기회였다. 이도현은 호롱불을 끄고 네덜란드 선박의 침실에서 잠을 청했다.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국면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함은 물론이었다. 그의 무인도 생존기는 이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계속>
다음 회 예고: 불법 채굴업자들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실종된 네덜란드인들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발견된다. 이도현은 복잡한 국제적 범죄의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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