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생존 프로토콜 -1장 출발 (1)
새벽 바다는 말이 없었다. 거대한 어둠이 수평선을 덮고, 희미한 별빛마저 바다에 삼켜졌다. 어딘가 무겁게 느껴지는 묵직한 파도 음이 사납게 철썩거리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도현은 낡은 방파제 끝에 서서 그 어둠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낚시가 되려나...”
손에 쥔 커피는 찬 공기에 식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흔넷, 회사에서는 팀장이란 직함 속에 묻혀 있었고, 가정에서는 무심해진 남편이자 사춘기 딸에게 멀어진 아버지였다. 그는 늘 중간이라고 생각했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딘가 허공에 매달린 기분. 하지만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을 때마다 중간은 단지 지나간 시간의 별칭이란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후...! 요즘은 너무 힘들어...”
커피를 비워내며 이도현은 옆에 선 남자를 흘낏 보았다. 강도식. 백두호의 선장이었다. 다부진 체구와 그을린 피부, 잔주름 속엔 바다 냄새가 박혀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야말로 그가 오래도록 바다와 주고받은 협상서 같은 것이었다. 그들 옆에는 박만수 기관장이 새 엔진 오일 통 뚜껑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뭔가를 확인했던 그의 혼잣말이 이도현 귀를 거슬렸다.
“씨... 또 이거야, 싸구려가 문제야...”
낡은 야구모자에 새겨진 소금 자국,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돌리는 담배 한 개비. 그는 오일 통 덮개를 두드리며 또 중얼거렸다.
“오늘은, 말썽을 부리지 말아라 제발….”
백두호, 스무 해를 넘긴 27톤짜리 낚싯배였다. 철판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고, 불규칙하게 솟은 용접 자국은 지난 시절의 흉터였다. 도식은 늘 말했다.
“바다는 고쳐 쓴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지. 버티다 고장 나면 운에 맡겨야지.”
그 말이 유난히 가슴에 걸렸다. 하지만 도현 역시 버티는 삶이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 좁은 오피스, 가정의 저녁 식탁. 모두가 서로에게 조금씩 닳아가는 공간 속에서 그는 살아 있는 거 보다 버틴다는 감각을 먼저 떠올렸다.
‘그래... 뭐든지 때가 되면 가기 전에 버터야지...’
바다낚시는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의식이었다. 설레는 손맛 느낌이 조금이나마 있으니 사서 고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다가온 선장이 말했다.
“여기 명단에 없는 분은 타시면 안 됩니다. 해경에 걸리면 처벌받아요...”
승객은 50명이었다. 대기실에서 서로들 눈치껏 알게 된 건 서울서 온 인터넷 방송팀 두 명, 낚싯바늘처럼 마른 70대 노인, 뻣뻣이 서 있는 대기업 사원 둘, 모녀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 스무 살 청년, 그리고 승선자 명단에 이도현이라고 기재한 자기 자신과 나머지는 단체로 승선한 낚시 동호회였다.
“일출 낚시 회원들은 5호 선실을 사용하세요! 자체 화장실을 사용하시고요...”
“...”
선장의 외침에 모두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쿨러박스를 굴리며 배에 올랐다. 바다 위 낚시꾼이란 원래 그러했다. 고기를 빼고는 서로를 돕지도 위로하지도 않는다. 선장은 건조한 음성으로 명단을 체크했다.
“저, 이도현씨...? 같이 온 분 없죠?”
“네...”
이름을 불릴 때마다 사람들은 짧게 예로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누구도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이도현은 선장의 손에 눈길이 멎었다. 검은 손등 위로 굳은살이 드러난 채 지워지지 않는 거친 상처들은 바닷일에서 얻은 표식이었다. 인원 확인이 끝난 선장은 곧바로 배를 움직였다. 선착장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낚시 배는 전조등 불빛을 반사하는 파도에 밀리듯 해안을 느긋하게 벗어났다. 잠시 후 먼동이 트자 해가 떠오를 법한 동편 하늘은 잿빛 구름 뒤에 숨어 있었고, 바람은 생각보다 세찼다.
“날씨가 심상치 않은데...?”
중얼거린 이도현은 조타실 난간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았다. 초록빛이던 물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남색으로 빛깔을 내주었다. 처음엔 그저 수심이 깊어져 그렇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뱃전 아래로 흐르는 물길이 어딘지 모르게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등 뒤로, 기관장 박만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바람이 만만치 않아요...! 조심해요...!”
친근한 거 같은 경고 목소리. 기관장을 힐긋 쳐다보던 선장 강도식이 팔짱을 낀 채 무심코 대꾸했다.
“허허…. 가을바람이 다 그렇지. 안 그래? ”
그렇게 말했으나, 강도식의 시선은 먼 수평선을 뚫고 있었다. 바다는 이상했다. 그렇게 날카롭지 않은데도 어쩐지 물살이 센 건 에너지를 잔뜩 품은 거였다.
“철썩! 철썩...!!”
“...”
바람이 세게 불었다가도 어느새 아기 숨소리처럼 잔잔한 건 불안한 징조였다. 마치 누군가 숨죽여 기다리다, 때를 보아 달려들 준비를 하는 눈빛 같았다. 도현은 설명할 수 없는 신호를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 어쩌다 태곳적부터 간직해 온 본능 같은 게 짙어지는 징조였다. 얼마 후였다. 검은 먹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조타실 창문을 두드렸다.
“후두둑...! 후두둑...!”
“젠장... 일기예보에는 비가 없었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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